시나리오가 A4 한 장을 넘겼을 때는 이제 더 놀랄 일이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게임이 실제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이는 새로운 종이를 꺼냈습니다. 이번에는 이야기의 다음 장면을 적는 종이가 아니었습니다. 고쳐야 할 것들을 적는 종이였습니다.
캐릭터 크기, 움직임, 변신 장면, 동굴 앞에서 들려야 할 말까지. 하나씩 적다 보니 수정 요청은 30개를 넘어갔습니다.
그렇게 우리 집에는 아주 작은 게임 개발팀이 생겼습니다. 기획자는 아이였고, 저는 요청을 정리해 AI에게 전달한 뒤 결과를 함께 확인하는 역할이었습니다.
실제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보이는 것들
종이에 그릴 때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갈색이는 갈색이답게 움직이고, 블록은 블록답게 크고, 수호요정은 알아서 주인공을 지켜줍니다.
하지만 화면에서 직접 보니 그런 것들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착한좀비는 가장 크게, 블록은 그보다 작게, 갈색이는 더 작게 보여야 했습니다. 수호요정은 가장 작은 모습으로 주인공 주변을 날아다녀야 했습니다. 캐릭터가 움직이는 느낌도 중요했습니다.
아이에게는 사소한 수정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머릿속에 있던 세계와 화면에 나타난 세계 사이의 차이를 맞추는 일이었습니다.
아이디어를 말로 들을 때는 몰랐는데, 실제로 만들어 보니 무엇을 바꿔야 할지가 더 선명해졌습니다.
30개가 넘는 요청, 다섯 개 이상씩 묶어 보기
수정사항이 쌓이기 시작하자 그때그때 하나씩 고치는 것만으로는 진행하기 어려웠습니다. 어떤 수정은 다른 기능에도 영향을 주었고, 너무 많은 일을 한 번에 맡기면 무엇이 바뀌었는지 확인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비슷한 요청을 묶었습니다. 캐릭터의 크기와 움직임, 배경과 장소, 아이템과 변신, 안내 대사처럼 서로 관련된 일을 모았습니다. 실제로는 다섯 개가 넘는 수정사항을 한 번에 묶어 구현하기도 했습니다.
아이의 목록을 옆에 두고 하나씩 체크했습니다. 화면에 반영된 것은 표시하고, 더 고쳐야 할 것은 남겼습니다. 새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또 적었습니다.
조금씩 체크 표시가 늘어나는 일이 은근히 재미있었습니다.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어려운 개발 용어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적은 내용이 정말 게임 안에서 일어나는지가 중요했습니다.
그 말은 반드시 수호요정이 해야 했습니다
여러 요청 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동굴 근처에서 들려야 하는 한마디였습니다.
여기는 크리스탈이 있는데, 동굴 안에는 나쁜좀비가 있어.
아이는 이 말을 꼭 수호요정이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처음에는 위험한 장소라는 안내만 보여줘도 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냥 글자가 뜨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게임을 시작할 때부터 곁을 따라다니던 작은 친구가 직접 알려줘야 했습니다.

그 차이를 이해하고 나니 이 대사가 다르게 들렸습니다. 아이가 원한 것은 단순한 설명문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옆에서 “조심해”라고 알려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수호요정이 공격을 막아주는 모습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주인공을 지키는 존재여야 했던 것입니다.
저에게는 그 점이 참 귀엽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이는 기능 하나를 추가해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캐릭터가 어떤 친구인지를 끝까지 지켜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갈색이가 블록이 되는 순간
변신 장면도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게임은 갈색이로 시작합니다. 바위를 깨고 크리스탈을 모아 세 개가 되면 블록으로 변신합니다. 다시 크리스탈을 모으면 착한좀비가 됩니다.
종이로 오리고 접었던 캐릭터가 화면 속에서 한 단계씩 달라지는 순간, 게임에는 작은 축하 같은 분위기가 생겼습니다. 화면이 어두워지고, 커다란 변신 글자가 떠오르고, 빛나는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아주 대단한 그래픽이 아니어도 괜찮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정한 규칙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블록이 되고 착한좀비가 되어도 수호요정은 여전히 곁에 있습니다. 처음 종이 위에서 정했던 역할이 게임 안에서도 이어지는 것입니다.
아이는 기획했고, 저는 하나씩 체크했습니다
이번 일을 하면서 AI가 해 준 일과 해 줄 수 없는 일이 조금 분명해졌습니다.
AI는 제가 정리한 요청을 코드로 옮기고, 기능을 바꾸고, 새로운 화면을 시험해 보는 일을 도왔습니다. 덕분에 이전이라면 시작조차 망설였을 작은 게임을 실제로 만들어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더 재미있는지, 어떤 캐릭터가 얼마나 커야 하는지, 수호요정이 언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는 AI가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기준은 아이에게 있었습니다.
저는 그 기준을 잘 듣고, 작업할 수 있는 크기로 나누고, 결과를 함께 확인했습니다. 한 번에 끝나는 일이 아니어서 오히려 더 많이 이야기하게 됐습니다.
아이는 상상하고, 저는 정리하고, AI는 구현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화면에 나타난 결과를 보며 우리는 다시 다음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이 게임은 언제 완성될까요?
처음에는 제가 아이에게 게임을 만들어 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조금 달랐습니다. 아이는 게임을 해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캐릭터를 만들고, 모험을 구상하고, 시나리오를 쓰고, 30개가 넘는 수정사항까지 정리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실제 화면으로 옮기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AI의 도움을 받아 구현하고, 아이와 함께 확인하고, 다시 바꿨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은 제가 혼자 만든 결과라기보다, 함께 다듬어 가는 작은 세계처럼 느껴집니다.
아마 이 게임은 쉽게 완성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내일 또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그게 조금 기대됩니다.
책상 위의 종이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화면 속에서 움직이게 됐고, 그 화면이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주고 있으니까요.